[경제플러스=한준기 칼럼리스트]

아, 옛날이여!

2005년 뜨거운 여름날, 오랜만에 한가로이 집에서 서재를 정리하고 있었다.

짧았지만 소신껏 최선을 다한 영국계 다국적 기업 디아지오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독일 기업인 BDF에서 이제는 매니저가 아닌 인사부문의 책임자로서 근무를 눈 앞에 둔 시점이었다.

책상서랍 맨 아래에 명함 크기로 코팅된 무언가가 있었다. 2년 전 이 회사에서 근무를 시작할 때, 우리 인사부에서 건네 준 전사 임원들과 팀장급 이상 직원들의 자택, 사무실, 핸드폰 번호가 기록된 ‘관리자 비상 연락망’ 이었다.

불과 2년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건만 비상연락망에 올라있는 수십 명의 인원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회사를 떠났고 아직도 회사에 남아있는 ‘추억의 멤버’들은 정말 몇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도 그리 행복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기간을 직장생활 하면서 참으로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정든 일터를 떠나는 선배, 동료들은 수없이 목격한 것 같다.

몇 주전에 정말 오랜만에 첫 직장 입사 동기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국내기업도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약35%이상의 직원들이 회사를 떠났고 이런저런 뒤숭숭한 회사 분위기 때문인지 직원들 사이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관리자 노조를 만들어 고용불안의 난관을 돌파해보자는 움직임도 있는듯하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필자가 근무했던 회사는 하나같이 변화의 소용돌이에 늘 있었던 것 같다.

필자가 유독 변화가 많은 회사만을 골라서 다녔는지 아니면 필자가 사는 이 시대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샐러리맨들을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아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세상인지에 대해서는 때때로 나 자신도 너무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이런 모습들은 주로 거대 기업간의 인수와 합병, 조직 개편, 조직의 슬림화, 능력 없는 직원의 퇴출 등이라는 이름아래 우리 앞에 나타난다.

개인적으로는 직원 대량해고를 했던 금융권이나 자동차 제조업체 등에서 근무를 해본 적은 없지만 ‘인사(人事) 장이’ 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 샐러리맨들에게 더 무서운 것은 조금 조금씩 정기적으로 계속 내보내는 ‘상시 구조조정’이다.

이는 그야말로 철저한 경제 논리가 바탕에 깔려있다고 본다. 매년 엄정한 성과 평가를 해서 가능성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내보내면서 동시에 일 잘해서 회사에 보탬이 되는 사람은 놓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직원들을 지속적으로 적당하게 긴장시키고 경쟁하게 만들어 놓는 것은 기본이다. 사회적으로 ‘웰빙’ 열풍이 불어 ‘몸짱’ 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을 했지만 사실상 가장 완벽하게 ‘몸짱’을 만들려고 애쓰는 곳은 기업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과 몇 면전에 경제부총리였던 모 인사가 한 기자회견에서 한국경제를 ‘몸짱’ 경제로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것은 결코 의미 없이 내 뱉은 말이 아닐 것이다.

실제 필자가 근무했던 대부분 회사들은 직원들을 많이 내보내고 몸집은 날씬해졌건만 1인당 생산성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흐린 날 속을 살아가고 있다. 따듯하고 화창한 봄날은 지나간 듯 하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끼어있고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곧 비라도 한 바탕 뿌릴 것 같다.

비가 올 것 같다는 일기예보가 있으면 정상적인 사람들은 모두가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우산 없이 혹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서봤자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비오면 쫄딱 다 맞는 수 밖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서도 우산 없이 외출을 하면 단순하게 준비가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겠지만 나 자신의 경쟁력을 키우고 커리어를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수많은 경제 기사, 전문가들의 충고와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똑똑하게 목격하면서도 아니 그보다도 매일 눈뜨면 마주하는 격동의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어떻게 잘 되겠지’ 하고 생각만 하는 사람을 단순하게 준비성이 없는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관대한 평가가 아닌가 싶다.

흐린 날에 우산 준비하지 않으면 기껏해야 비 쫄딱 맞고 감기몸살밖에 더 걸리겠는가? 아니 막말로 돈 주고 우산 하나 살수도 있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저기까지만 같이 좀 쓰고 가자고 떼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까지 있는 내가 나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에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하소연하지 못하는 피 멍이 들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는 적어도 두 가지는 꼭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 모두는 이제’25-30-10’의 법칙이 상식으로 통하던 시대에서’30-15-40’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대로 넘어선지 오래다.

즉 25세에 취직해서 30년 정도 직장 생활하다 정년 퇴직해서 퇴직금, 자식들 도움 등으로 10여 년 여생을 별 탈없이 살다 하늘나라로 가는 삶에서 이제는 30세 정도에 겨우 취직한 후 15년 정도 직장 생활하다 ‘사오정’되서 나왔는데 평균수명은 길어져서 40년 정도의 여생이 눈앞에 있고 퇴직금,국민 연금, 자식들 도움 등 그 어느 것 하나 만만해 보이는 것이 없는 세상 속에 놓여있다.

이제는 ‘직장’ 그 이상의 것, 즉 커리어 관리 잘해서 전문성을 살리는 ‘평생 직업’을 준비를 해두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적어도 나 자신의 커리어관리에 관해서는 매우 진보적이며 사업가적인 사고를 해야만 한다.

진보적 시각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잘 대응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변화 상황을 예측하는 동시에,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와 같은 샐러리맨은 아니지만 북미 아이스하키리그의 전설적인 영웅 웨인 그레츠키는 진보적 사고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아이스하키 선수의 성공에 필수적인 조건인 체격, 체력, 스피드 이 각각에 있어서는 절대지존의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은퇴하기 전까지 20여 년 동안 894골을 넣어 최다 득점을 올렸고, 1,963개의 최다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아홉 번이나 MVP로 뽑혔다.

어떻게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아무나 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였다.

“나는 아이스하키 퍽(puck)이 어디에 있었는지가 아니라,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하고 경기를 합니다.” 이제 우리도 모든 사람들이 늘 뻔하게 하는 생활에서 탈피를 해야만 한다.

진짜 생존하고 전문가로서 성장하고 성공을 하고 싶다면. ‘관성의 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 근무시간 끝나면 퇴근하고 퇴근하다 한 잔 걸치고 집에 와서 TV보고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방향도 없이 무척이나 바쁘게 뛰고 그렇게 이유 없이 바쁜 생활에 안도의 한 숨을 쉬고 때가 되면 나오는 월급에 길들여 지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월급 인상액수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생활과는 과감한 이별을 고해야 한다.

아래 보이는 삽화에 나타난 것처럼, 저 멀리 거대한 빙산이 놓여있는데도 그것이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느끼고 위기가 닥치면 대충 어떻게든해결이 될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다가 익사해 버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된다.

우리는 이제 변화에 대응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만 한다. 새로운 세상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데 아주 뛰어난 그런 인재를 점점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흐린 날에는 비바람으로부터 나를 막아 줄 튼튼하고 커다란 우산 하나, 그리고 이왕이면 내 몸의 따듯한 체온도 유지시켜줄 수 있는 멋진 레인코트까지 한 벌 마련해 놓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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